예술을 보는 방식

예술을 어떻게 사유할까.


Soohyun Jeong, Nov 11, 2019





나는 영화를 볼 때 감독이 누군지, 스토리가 어떤지,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극장에 가곤 한다. 시놉시스와 해석을 알고 보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로 감각하고—이미지를 감상하는 동안 어떤 해석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게 싫다—, 모호한 부분은 감독의 의도대로 모호함을 느끼고,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의문의 상태를—영화 보는 순간만큼이라도, 왜냐면 영화가 끝나는 즉시 감독의 의도와 평론가의 해석들을 찾아볼 것이기 때문에—느끼는 게 좋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영화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에도 적용된다. 책, 그림 등 어떤 작품을 보더라도 배경지식을 갖지 않은 무지의 상태, 작품을 마주한 나의 감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로서 맞닥뜨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인상적인 예술을 마주할 때마다 원하는 것이다.

분석과 해석은 한 번 시작하면 얼마든지 더 파고들 수 있지만 작품을 아무런 영향 없이 스스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는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태를 답답해하거나 불편해하고 심지어는 두렵게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이력이나 배경 지식을 알고 작품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 불안함을 지우고 싶을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고 생각해보자.

"안녕하세요. 제가 당신이 어떻게 태어나게 됐는지 미리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당신의 부모님은 20대에 가난하게 예술 생활을 하다가 30대에 어떤 작품을 보고 그것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 당신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 작품의 특징인 분열하는 자아를 갖고 있으며… 당신의 성격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제 내면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애착의 부족 때문입니다… 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요? 아닙니다. 제가 조사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이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더라고요…."

우리는 작품이 작품 그대로, 자유롭고 독창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목적이 알고 보는 것의 이로움을 격하시키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시기 예술은 형식과 사조가 미술을 감상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사회적 활동을 포함하는 예술은 그 시대의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하다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라도 '좋은 예술 작품을 여러 번 보고 분석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좋은 작품은 반복해서 보는 것이 명백히 이로우며, 반복해서 봐야만 한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무지의 상태로 예술을 마주하기, 그리고 감상을 말하기가 '초짜 같은, 대중적인, 비전문적인' 인상을 줄 지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중세 예술에서도 미술의 형식보다는 보는 나의 감각이 중요하다. 때로는 정신분석을 기조로 하는 작품에서도 정신분석보다 작품의 표현을 감상해보는 게 중요하다. 그 생각들이 단순하고, 모순적이고, 혼란스럽고,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중요하다.

따라서 감상자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역사와 지식이 아닌 감상자 스스로가 좋은 예술을 사유하고, 공감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방식이 예술 전반에 깔려있는 엘리트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에게 다가가길 꺼리게 하며 예술을 다른 세상 이야기로 느끼게 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예술 주변에서 풍기는 엘리트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품이,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작품이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숨겨진 비밀 따위는 없다고, 작품을 보이는 그대로 느끼기만 해도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예술 작품의 가치를 탐색해나가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을 그 누구에게도(저명한 학자에게도, 비평가에게도, 심지어는 작가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대 안에 있는 모든 책들을 불태워 버려라.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36쪽, 39쪽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하는 게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것일까? 무엇을 느껴야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접근할지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봤다.


✦ 해석을 찾아내지(만들어내지) 않기


특히 영화 리뷰에서, ‘OO 영화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어떤 장면에 대한 숨겨진 의미를 파고드는 리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들은 결코 작품을 설명하지 못하며 작품과는 완전히 별개인 일정한 공식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는 이수명 시인의 <표면의 시학>에 나오는 표면과 이면에 대한 글이다.

감추어진 것은 사실상 없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감추어진 어떤 것을 찾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물론 찾는 것은 감추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우리는 사실상 찾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면은 하나의 덧붙여진 체계이다. 인간에게 지속되어온 이 질서는 우리를 강박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 이면의 자리, 인식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상상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 있는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온 것이다. (…) 이와 정반대로 눈앞에 있는 것, 드러난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 이 강력한 직접성이 바로 시이고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표면의 시학, 41p.


작가는 위의 글에서 우리가 관념을, 상징을, 상상을 감춰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내며’ 그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상징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상징은 세계를 낮은 물질 세계와 높은 이념 세계의 수직적 연결로 생각한다. 그것은 사물 위로 높은 이념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며, 일종의 관념적 가정이다. 이 관념이 가장 부풀려진 것이 상징주의다. 상징주의에서 사물은 관념의 표상으로 해석되며 이 까다로운 작업은 가장 권위 있는 정신의 활동이 된다. 상징주의는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시선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에 들어서 수직적 사고가 사라지면서 상징은, 그리고 은유는 외려 고색의 근거로 보이기조차 한다. —위의 책, 57p.


책에서 이 구절을 읽고, 너무나 속이 시원한 나머지 밑줄을 긋고 느낌표(!!!)까지 적었다. 사람들이 그토록 모든 예술을 상징으로, 오로지 상징만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렇게 지적이고 고상하게 쓸 수 있다니. 상징 해석은, 모든 것을 일대일 치환하는 평면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다. 관념과 표현이라는 수직적 구조를 강화하는 구시대적 방식이다. 구시대 작품은 구시대 방식으로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 작품을 보면서 구시대적으로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상징에 집착하지 말자. 숨겨진 해석을 찾지 말자.



✦ 작품 그대로 감각하기


1. 우선, 작품을 ‘목격’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부엌의 달걀이 깨어지지 않도록, 오직 피상적인 주의를 기울여 바라본다. 나는 달걀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달걀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약 내가 달걀을 이해한다면 그건 착각일 것이다. 이해란 착각의 증거이다. 달걀을 이해하는 것은 달걀을 보는 옳은 방식이 아니다. —달걀에 대해 절대로 생각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달걀을 목격했다는 한 방식이다.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 중


달걀을 보듯 작품을 보기. 피상적인 주의를 기울여 이해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응시하기.

2. 그다음으론, 작품과 작품에 대해 대화하기. 배경지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표현된 것,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작품이 하는 말을 들어보기. 작품이 스스로 말하는 의도를 추측해 보기. 작품을 작품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3. 설명글을 읽고 작품을 맥락 안에 위치시키기. 작가가 의도한 대로 느꼈는지,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기. 맥락이 중요한 작품이라면 설명글을 읽기 전 제목과 재료, 표현으로 알아챌 수 있었는지, 작품 속에서 관객을 이끄는 작은 실마리들을 생각해보기. 탐정이 되어서 빵가루를 따라가 보기.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작품의 설명글 역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가치를 다 알 수 없고, 때로는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경우까지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설명글이 미술관에 의해 쓰인 경우에 그 글은 ‘작품을 해당 미술관이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한 글이며 그러므로 단지 참고 사항일 뿐이다. 무엇보다 관람객은 작품에 있는 실마리(제목, 표현, 재료, 작가 노트)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작품을 생각하고 감각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작품의 진실에 더 가깝다.

우리는 각각의 이미지들 앞에서 그 이미지들이 동시에 (우리를) 어떻게 쳐다보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만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시간을 열기, 눈을 무장하기>


✦ 인상을 나열하기


1. (상징과 해석의 1:1 짝짓기가 아니라) 작품의 인상에 대해, 그로 인해 떠오르는 인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인상은 전혀 상관없는 순간의 기억일 수도, 읽었던 책의 구절일 수도, 다른 작품의 작은 부분일 수도 있다. 떠오르는 이미지 / 기억 / 사물 / 텍스트를 나열한다.

그것들은 모종의 이유로 비슷할 수도 있고, 정반대의 것일 수도 있다.

2. 왜 그 이미지 / 기억 / 사물 / 텍스트 가 생각났을까? 어떤 점이 비슷하거나 다르다고 생각된 걸까? 이유를 생각해보고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정리해본다.

3. 그러나 때때로 어떤 인상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만약 비슷하거나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이질적인 인상이라면? 이질적인 인상들이 나열된다면? 아래 바르트의 글을 읽어보자.

존 케이지. 그가 버섯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전에서 음악(music)과 버섯(mushrooms)이 서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서로에게 현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묶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하기에 아주 어려운 공현전(共現前)의 방식입니다. 환유적인 것도 아니고, 대조적인 것도 아니고, 인과적인 것도 아닌 공현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논리성이 없는 연속, 하지만 논리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 연속. 즉 중립적인 연속. 이것이 바로 하이쿠 모음집의 바탕일 듯합니다.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75쪽


‘환유적인 것도, 대조적인 것도, 인과적인 것도 아닌’ ‘논리성이 없는 연속, 하지만 논리의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 연속. 즉 중립적인 연속’으로서 인상을 나열한다면. 작품을 감각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깨워내고 발견해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 작품은 이제 내가 감각하는 여러 인상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마치 정원을 가꾸듯,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식물들 사이에 새로운 풀을 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