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
* 인용은 번호로 표시했습니다. 글 아래쪽을 참고해주세요.
완전히 독해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글
3주째 같은 문장을 바라본다. 너무나 강렬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문장. 문장을 만난 감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게 만드는 문장. 보고 있자면 도저히 눈이 떨어지지 않는 문장. 도저히 책을 더 읽어 나갈 수 없는 문장. 그런 문장들. — 달걀과 닭을 보고 쓴 일기
〈달걀과 닭〉을 처음 읽으면 오로지 (어떤 문장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놀라움과 (계속 읽어도 전혀 해소되지 않는) 낯섦만이 느껴진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독서라고 설명될 수 없으며, 가장 근접하게는 일종의 경험적 충격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전 생애를 통틀어 글은 읽음으로써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글은 읽기 시작하는 순간 이해는커녕 무엇을 읽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침에 달걀을 본다. 나는 단 한 번의 시선으로 부엌 탁자의 달걀을 응시한다. 그리고 즉시, 인간은 달걀을 볼 수 없음을 깨닫는다.1
첫 문장에서 달걀을 보았으나 곧 세 번째 문장에서 인간이 달걀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이전의 행동이 불가능했다니, 그럼 첫 문장에서는 어떻게 달걀을 보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문장들은 불안을 야기하고 독자는 충격에 빠진다. 앞 뒤의 문장은 시간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저 그 문장이 다른 문장들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서사가 아니라 문장 자체로 존재한다. 만약 우주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다면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이 암흑으로 가득한 공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손을 휘저어도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똑바로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우주처럼, 아무리 앞뒤 문장을 다시 읽어도 독자는 글 안에서 필연적으로 길을 잃는다.
글을 읽음으로써 초점과 위치를 상실하기. 어둠 속에서 부유하기.
〈사랑〉에서 아나는 껌을 씹는 맹인을 보다가, 비명을 지르고, 필사적으로 좌석에 매달리고, 엄청난 쾌감과 놀라움, 불안함, 열기를 느끼며 광폭한 연민에 휩싸이다가, 달콤한 역겨움을, 지옥의 공포를 느낀다. 아나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독자 역시 인물이 느끼는 엄청난 감정에 함께 휩쓸리면서 글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위치를 잃게 된다. 글이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대지에 발 딛고 한 곳을 응시하던 주체는 안정적인 인식과 지각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정신없이 부유한다.
… 주인공들의 잘 가다듬어진 고요한 일상의 표면 아래에서 돌연히 분출하듯 솟아 나온다. 어떤 순간이 갑작스레 닥친다. 내면의 지진이 일고 감정들이 폭발한다. … 입체적인 명상의 어휘들이, 환각과 최면의 어휘들이 쏟아진다.2
소설 결말에 이르러 남편이 아나를 안고 안심시킬 때3 마침내 독자 역시 남편의 손에 안겨(끌려) 내려가 땅에 발을 붙이고 드디어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와 몰이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방향 없는 부유에 그리움을—당연하게도 대지의 안정감에 지긋지긋함을—느낀다. 아나가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을.
그렇기에 이런 몰이해 속에서도 문장들은 단박에 이해된다. 의식의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전 단계, 독해의 전 단계, 맞닥뜨리는 것에서 다가오는 이해. 그 사람의 생애를 알아서 생기는 이해가 아니라 그냥 그를 마주치는 것으로 생겨나는 이해. 〈용서하는 신〉에서 쥐를 밟을 뻔한 찰나에 탄생하는 이해.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내 앞에 떨어진 이해.
〈달걀과 닭〉 혹은 그의 글을 읽는 하나의 방법은 오로지 그의 글에서 말하듯 ‘피상적인 주의를 기울여서 바라 보기4’이다. 글은 글 자신에 대해 ‘절대로 생각하지 않5’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독자는 글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절대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인식으로는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글은 독자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 자신에 의해 재귀적으로 정의된다.
여성으로 존재하기
여성으로 존재하기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끊임없이 상실하는 것이며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속해서 비난하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외부의 눈으로 감시하며, 타인에게 평가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부에 극복하지 못할 간극을 설치6’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속해서 죽이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여성들은 '가슴속에 단 한 점의 세계도 없는 순간을 위하여7' 기도했고 증오를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회귀하지 않을 수8' 없었으며 스스로를 항상 '비통하게 견디면서9' '자신의 본모습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느라 항상 바빴10'던 한 편 '이름도 없이 삶을 먹였다. 그것을 원했고 그것을 선택했다.11'
그의 글을 읽는 행위는 곧 여성으로 존재하기와 다름없다. 끝없는 투쟁의 복판에 서는 것에 다름없다.
(심지어) 제3세계 여성으로 존재하기
이질적이고 비문명적인, 동물이나 다름없이 취급되는 타자로써 제3세계 여성. 그의 글에서 그는 자신이 달걀을 위해 고안된 장치임을 깨닫지 못하고 ‘행복한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닭12’이기도,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친 (그러나 삼일 만에 죽어버린) 원숭이 리세치이기도 하다.
그녀는 한 마리 개처럼 보였다.13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에서 ‘작은 꽃’은 서구 남성 주체가 폭력적으로 정의 내리는 원주민 여성이다. 이름 짓기 메타포는 다른 글에서도 남성성/여성성, 이성/광기, 로고스/감성 등의 남근이성중심의 논리에서 이항대립체계에 따라 나눠진 전형적 이분법 구조를 보여주는 요소로 자주 사용된다.
그들이 만난 것이 금요일이었기에, 로빈슨 크루소의 달력에 따라 그는 ‘프라이데이’가 된다. 그가 크루소와 만나기 전에 불렸을 이름은 지워진다.14
이 소설에서 그의 부족인 ‘리쿠알라족은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몸짓과 짐승 소리를 흉내 내어 사물을 가리켰다.’15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무조건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서양 남자의 강박 때문에 작은 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자연스레 그는 서양인의 시선으로 기존 체계 속에 위치 지어진다.
그 뒤 작은 꽃의 사진을 보는 서양 사람 정확히는 서양 여자들이 나열된다. 그들 각자는 충격을 받고, 낯설어하고, 위계를 설정하거나 자신을 투영한다. 첫 번째 여자는 기이함과 이질성에 너무나 괴로워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못한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소녀는 ‘폭압적 사랑의 공포를 가장 많이 느끼는’ 존재로, 작은 꽃과 스스로를 완전히 동일시한 나머지 불행은 끝이 없다고 느낀다. 네 번째 여자는 작은 꽃을 짐승이라 말한다.
다섯 번째 여자는 작은 꽃을 사물처럼 대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사악함과 흉폭함을 느낀다. 그리고 ‘유난히 고상하고 예절 바른 미소로 작은 꽃의 투박한 얼굴 사이에 수천 년에 걸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간극을 설치’한다. 그는 앞서 말한 이분법의 세계에서 권장되는 층위에 속하기 위해 작은 꽃과 거리를 두어야만 함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작은 꽃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는 마치 동물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며 자기 자신에 투영하는 사람처럼 구석에 잘 숨겨놨던 불편함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한다. 이 부분을 읽고 있자면 작가가 독자들이 어떠한 의심이나 혼동의 여지없이 적확하게 독해하도록 의도했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희귀한 것 자신은 어떨까?’
작은 꽃은 탐험가를 보며 부드럽게 웃는다. 탐험가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물화하는지 따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웃는다. ‘그것은 말하지 못하는 자만이 가능한 웃음이었다.’ 서구 인식 틀로 환원되지 않는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으로써 웃음. 기존 담론 권력 안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언어 이전의 표현일 것이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언어 자체가 이미 담론 권력 안에서 이데올로기화 되어있으며 들릴 수 있는 말이 되기 위해 공적 담론 체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하위주체(Subaltern. 서발턴은 특히 식민주의적, 가부장적 상황에 놓여있는 피억압자를 가리키며 이 글에서는 작은 꽃이 서발턴 즉 하위주체다)의 목소리 의식을 필연적으로 굴절시킨다고 말한다. 기존 언어와 담론의 한계 안에서 선택하고 발화할 때 이미 여러 차원에서 왜곡된 서발턴의 언어는 말하는 것 만으로는 주체로서 세계에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골격만 남은 무지한 설명을 꿰뚫고 존재하는 거대한 이질성이다16. 리스펙토르는 이 거대한 이질성을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이건 그녀가 직접 한 말이 아니고 그녀의 눈이 너무도 짙은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대신 대답한 내용이었다.
작은 꽃이 눈이 짙어지는 웃음으로 대답한 이유는 단지 언어를 몰라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꽃의 생각과 감정이 ‘현존하는 언어를 초과하는 장소에 놓여있기 때문’17이며 지배 담론이 작은 꽃의 가치 체계를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은 꽃은 이 웃음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바로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 있다는 형용할 수 없는 완벽한 감정, 탐험가를 향한 심오한 사랑이다.
그러나 숨 막히는 밀림의 습기 속에는 그런 잔인한 세련됨이 없고, 사랑은 잡아먹히지 않는 것, 사랑은 장화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 사랑은 그 남자의 검지 않은 피부색을 좋아한다는 것, 사랑은 반짝이는 반지에 대한 사랑으로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희귀한 것'인 그의 웃음에 탐험가(서구 남성 주체)는 불쾌감과 당혹감에 빠진다. 탐험가는 웃음으로 답하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심연을 향해서 화답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모자를 고쳐 쓰는 척 점잔을 빼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기록을 시작한다. '기록을 하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과 온 힘을 다해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귀한 것인 작은 꽃은 끝까지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
스피박은 마슈레(Pierre Macherey)를 인용하며 "말하고 있지만 말할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서발턴 여성을 들으려는 노력이 포기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마슈레는 자신의 문학이론에서 "책이 말하는 것은 어떤 침묵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16
마치며
그는 여성으로 존재하기를 피해자/가해자 악인/선인 객체/주체의 이분법으로 말하지 않는다. 부조리를 단순히 전시하거나 비꼬지 않고 뻔한 악당을 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그 진창을 가만히 직면한다.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불편하도록 집요하고 섬세하게,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인 것처럼 어떠한 가정도 하지 않으면서. 무지한 사람들, 사랑으로 잔인해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책 표지가 작가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불가피하다.
달걀과 닭의 표지는 커다란 책을 넘치도록 뒤덮은 중년 여성의 무표정한 응시로 채워져 있다. 꽉 채워진 작가의 얼굴은 어디서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도록 강렬하다. 문득 어두운 곳에서 마주친다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의 표정은 무정하고 무심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집요해 보인다. 한껏 올라간 갈매기 모양의 얇은 눈썹, 눈과 눈썹 사이 움푹 파인 그림자, 두껍고 강하게 그린 아이라인, 꾹 다문 입, 전체 형태를 알 수 없지만 거칠게 굴곡진 머리카락. 전체를 본다면 사자 갈기 같은 모습 일거라 상상한다. 길고 잘 정리된 손톱, 뒤표지로 이어지는 얼굴을 받치고 있는 손, 엄지와 검지를 올려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마치 앞의 물체를, 사람을 유심히 보는 듯하다. 혹은 뚫어져라 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하다. 관찰하는 여성의 얼굴. 표지를 보는 나는 자연스레 그에게 관찰당한다. 혹은 관통당한다. —달걀과 닭 표지를 보고 쓴 글.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위대한 작가의 글은 세계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원숭이〉에서 큰아들이 “엄마는 리세치하고 정말 많이 닮았어요!”라고 말했을 때 그에 대한 답으로 ”나도 널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라고 말하듯이. 그는 때로는 사랑이 폭압적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사랑에 질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묻는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죽임을 행했을까18’ 그는 고민한다. ’태어난 것이 곧 두려움인 존재를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19’ 우리가 살면서 진실로 고민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외인부대〉에서 이 세상 이치를 모두 깨친 너무나 완벽한 소녀에게 작가는 외친다.
오, 너무 겁내지 말아라! 우리는 사랑 때문에 죽이기도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맹세컨대, 언젠가 우리는 잊고 말 거야. 맹세할 수 있어! 우리는 사랑을 아주 잘하는 건 아니니까, 내 말 듣고 있지?
1)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2019). 달걀과 닭 (배수아 역). 봄날의 책. 8p.
2) 372p. (옮긴이의 말)
3) 38p. (사랑)
4) 9p. (달걀과 닭)
5) 9p. (달걀과 닭)
6) 129p.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
7) 38p. (사랑)
8) 282p. (버팔로)
9) 100p. (소피아의 재앙)
10) 101p. (소피아의 재앙)
11) 26p. (사랑)
12) 15p. (달걀과 닭)
13) 127p.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
14) 김은주. (2017).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봄알람. 62p.
15) 이 단락에서 작은 따옴표로 표시된 문장은 모두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에 나오는 문장이다.
16) 김애령. (2012). 다른 목소리 듣기. 한국여성철학, 17(), 35-60. 에서 가야트리 스피박,『 포스트식민 이성비판』, 태혜숙·박미선 역, 갈무리, 2005. 재인용
17) 위 논문, 51p. 재인용.
18) 129p.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여자)
19) 166p. (외인부대)
참고문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2019). 달걀과 닭(배수아 역). 봄날의 책
김윤정. (200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 여성적 글쓰기. 중남미연구, 23(1), 107-125.
김애령. (2012). 다른 목소리 듣기. 한국여성철학, 17(), 35-60.
김은주. (2017).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봄알람.
히토 슈타이얼. (2019). 진실의 색. 워크룸. 증인들은 말할 수 있는가? : 인터뷰의 철학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