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스타 디자이너들이 이끄는 디자인 (야근) 낙원


— 디자인 신성화와 야근의 상관관계


Soohyun Jeong, Jul 29, 2019





직업으로써 디자인, 디자인 업에 대한 대부분의 감상은 ‘야근이 많고 노동 강도가 강하다’ 일 것이다. 이 감상은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가리지 않는다. 사실 디자인 업계만 유난히 야근이 많다기 보단, 한국의 기업문화 자체가 야근이 잦기는 하지만… 왜 유난히 ‘디자인 = 철야’라는 공식이 생겨나며 이 문화는 어떻게 유지될까?

실무를 하는 디자이너라면 이 문제에 대해 다들 이골이 나 있을 테지만, 굳이 이 지겨운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몇 달 전 친구로부터 받은 나에게는 문제적이지만 일반적으로는 문제 될 게 없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다.


배달의 민족에서 2018년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위해 준비한 마스킹테이프 굿즈. 출처

여기에 최근 몇 년간 가장 인기 있고 잘 팔리는 브랜드가 (예비) 디자이너에게 파는 상품의 문구를 들여다보자.

‘인간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전달하는 …’
‘디자이너의 책임은 …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굉장히 거대해서 읽기만 해도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사람을 짓누르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문장이기도 하다. 디자인은 세상을, 사회를 바꾼다는 말. 디자인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겹게 듣는 말이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디자이너에게는 숨겨진 엄청난 힘이 있어서 갑자기 슈퍼 히어로 마냥 세상을 구해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디자인 대학에서는 어떨까? 이 말을 가장 활발하게 실험하고, 연구하고, 추구하는 곳이 바로 디자인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대 학생들은 과거 유명 디자이너(르코르뷔지에, 안상수 등…)들의 혁명적 디자인을 배우고, 나도 정식 디자이너가 되면 모든 것을 바꿔버릴 수 있는 디자인을 하리라 꿈꾸며 그 이상을 디자인 과제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 바로 야작이다. 야작, 야작, 야작. 디자인대 학생들이라면 ‘오늘 뭐 먹을까’라는 말만큼 ‘오늘 야작 해’라는 말을 한다. ‘오늘 점심 뭐 먹었어?’란 질문을 하는 만큼 ‘오늘 야작 해?’(답변은 응 / 당연한걸 왜 물어봐 / 너도? 등이 있다)라는 질문을 한다. 디자인 대학에 들어온 이상, 야작은 필수이며 문화다. 아니, 디자인대 학생의 정수며 명예이자 영혼이다. 디자인대 학생들은 야작을 해야만이 이 디자인 과제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으며 창의력이 샘솟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긴다.


사실을 말하자면, 디자인대 학생들이 야작을 하는 이유는 디자인에 건강과 인생을 걸만큼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한 교육 시스템과 과중한 업무량, ‘이렇게 하더라’는 문화 때문이다. 그리고 전날 술 마시고 놀아도 다음날 가뿐하게 밤을 새울 수 있는, 3일 연속 3시간만 자고도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20대 초반의 건강한 몸 때문이다.







방금 전 까지는 디자이너가 세상도 구하고 사회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야작이나 하고 있다. 그럼 이 위대한 야작 동지가 우리를 디자인 낙원으로 데려다주는가? 우리를 스타 디자이너로 키워주는가? 정답은 독자들도 잘 알고 있을 듯하다.

다시 아까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디자인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적으로’, 어떻게 디자인이 나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며, 디자인이란 것이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인가? 디자인에서 디자이너의 증명된 존재를 느낀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차라리 저주 인형에서 원혼을 느낀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혁명을 이룰 수 있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여기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를 논하진 않을 것이지만,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하고 넘어가지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디자이너의 존재를 증명하는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좋은 디자인이 왜 한낱 창작자의 존재나 증명하고 있겠는가?)


그 모든 거대한 말들이 100% 거짓이고 환상이다!라고 단언하고, 우린 모두 망했다고, 비관론자가 되자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어디에선 진짜로 (세상은 못 바꾸지만 디자인 역사 정도는 바꾸는) 대단한 디자인이 생겨나고 있겠지만, 0.0000001%가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장들의 효과는 무엇일까? 이 문장들은 우리가 무언가 엄청나고 대단한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일종의 가스 라이팅이다. 희생은 (학생, 예비, 초년생, 젊은, 새내기) 디자이너의 건강과 시간으로 치를 것이며, 수혜는 디자인 회사 대표, 클라이언트, 교수가 받을 것이다. 이런 가스 라이팅에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내던져진 (학생, 예비, 초년생, 젊은, 새내기)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의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이해할 수 없는 상사의 지시에 맞춰 돈을 벌기 위한 디자인, 일명 영혼 없는 디자인을 하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디자인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사회를 바꿀 수도 없으며 유명 디자이너의 대단한 작업물은 아주 제한적인 환경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가려지고, 디자인에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 월급이 적은 소규모 스튜디오에 가서 매일 철야 작업을 하거나, 포트폴리오가 될 만한(될 만한 거지 되는 것은 아니다) 재밌으나 작업비는 주지 않는 수많은 공짜 / 저임금 외주를 받는다.


따라서 이 말들의 기대 효과는 간단하고 뻔하게도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서 팔아대며 환상에 젖어 기꺼이 과한 업무를 버텨내는 노동자를 충원하는 것이다. 디자인 대학은 아주 작은 사실에 아름다운 환상을 잔뜩 붙여 그 환상만큼 가격을 올려 파는 기업이다. 앞서 배달의 민족에서 그 문장을 굿즈로 파는 이유가 있다. 저 문장들 자체가, (잘 팔리는) 상품이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한 문장이다.



디자인으로 대단한 것을 이룰 수 있고. 이뤄야 한다는 말이. 우리를. 디자인계를. 병들게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한 친구가 다른 주장을 해왔다. ‘그 말들이 환상이긴 해도, 대학에서는 이런 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

일단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환상이지만 ‘좋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그 좋은 환상의 효과가 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짚고 넘어왔다. 둘째, 사회에서는 아무도 안 하니까 학교에서라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왜 사회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환상의 기대 효과는 결국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는 것인데, 그 임무를 학교에서 충실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기업도 나름대로 그 환상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지만(배민의 마스킹 테이프를 보라) 실제 디자인 노동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내가 제대로 된 보상을 못 받고, 과중한 업무를 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배운 환상들 덕분에 내가 흔쾌히, 기꺼이, 내 의지로 이 굴레에 들어왔다는 것을. 그렇다면 대학에서 그 말들을 해야 할 이유는, 앞서 말했듯 그 말들이 잘 팔리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틀렸는데, 실제로 매일 야근을 강요해서 디자이너들을 병원으로 보내는 스튜디오의 디자인 철학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디자인 대학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멋진 단어들을 나열한다. 정수, 근간, 초월, 경지... 놀랍게도 한 페이지에 저 단어가 모두 실려있다!)

왜 21세기에 들어와서까지도 디자인 업계는 디자인 신성화와 메시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천재성이니 재능이니 경지니 하는 모든 말들은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보면 아무도 이런 식으로는 일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사실 우리가 아직도 디자인 ‘업무’를 체계화하지 못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누가 그런 말들을 하는지, 누가 그런 말들로 이익을 얻는지 살펴보자. 원로 디자이너, 교수, 잘 나가는 선배들… 다들 자기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거나(고용주) 아랫사람을 구슬려 노동력을 뽑아먹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순진한 머저리다. (어떤 경우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피해야 한다)







내가 나온 대학의 분과에는 선배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있다. 졸전 삼 일 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며 뒤집어엎었다 / 며칠을 밤새서 만들어 온 모형을 교수가 눈앞에서 산산이 부셨다… 교수들 중 한 명은 마지막에 몰아붙이는(뒤집어엎는) 것이 자기의 교수법이라고 자랑하듯 설명하기도 했다. 이 모든 만행들이 수업을 체계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한 교수의 능력 부족과 재능, 영감, 역경을 딛고 생겨나는 통찰이라는 미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이제는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뿐만 아니라 디자인 대학에서 교수들이 조장하는 문화, 사회 나가서 선배들이 공고히 하는 문화, 아름다운 말로 포장된 그 문화가 디자이너의 건강과 시간, 돈만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올해 4월 논란이 되었던 ‘디자인 회사 폭로문’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대역 죄인이 됐다’

‘디테일한 피드백은 계속 이어졌는데 실체나 뚜렷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선 한 개도 못 긋겠다'

‘우리 이제 이렇게 일하지 말자’

‘마감일 전 1주일은 새벽 5시-아침 7시에 퇴근’

‘눈치'

‘디자인이 그렇게 사람이 죽을 정도로 대단한 압박감을 주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맞다. 디자인은 사람이 힘들어 죽을 만큼 대단한 게 아니다. 디자이너들의 수명을 갈아 만든 디자인이 아무리 아름다운 들, 그게 ‘인간을 위한’ ‘좋은’ 디자인인가? 그들이 말하는 인간에 디자이너는 포함되지 않는가? 진정한 디자인 / 인간을 위한 디자인 / 천재적 디자이너 등 순진한 이야기를 하면서 교수, 선배, 기업이 밤샘 문화를 조장하고 있는 순간에 현실의 디자이너들은 죽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말만 되풀이하는 사람들은 착취적 체제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부역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말의 효과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혹은 그 효과를 인지하고 이를 이용하고자 있어 보이는 척 멋진 공수표를 던지는 일부(혹은 대다수) 선배 디자이너들 역시 무책임하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이 결코 새로운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이미 선배 디자이너들이 되풀이해온 말이고, 나 역시도 이 글을 쓰기까지 같은 논조의 말을 하는 디자이너들의 글을 많이 읽어왔다(이 글 또한 선행한 글들 덕분이다). 그럼에도 이 주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예외로써 가시화를 돕는 활동이기 때문이며, 좋은 말, 좋은 가치의 부작용을 비판했을 때 내 주변의 디자이너들 또한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거나 알고 있더라도 이해를 위해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미팅 자리에서 ‘디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으로 저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클라이언트가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아는 한 디자이너를 꿈꾸는 학생들 역시 ‘야근은 좋지 않다’ 이상의, 교수와 선배가 말하는 ‘좋은 가치’들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배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이 글의 요지는 ‘디자인으로는 아무것도 못 바꿔’가 아니다. 우리는 좋은 가치를 추구할 자격과 자유가 있다. 나 역시도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길 희망한다. 다만 저 가치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야근이 만연한 디자인 업계 문화 속에서 갓 2년 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들은 무엇일까?

- 많은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전하기
- 과로와 철야를 자랑삼지 않고 오직 두려워하기
- 실제로 나와 같이 일하는 팀원 모두 과로하지 않기
- 따라서 생활비 이상의 돈을 벌기 위해 철야를 강행해야만 진행할 수 있는 일을 받지 않기
- 디자인 업무의 아우라를 벗겨내고, 디자인 업무를 모든 걸 바쳐야 하는 위대한 일이라고 과대 포장하지 않으며, 디자인 업무를 체계화하기
- 무급, 저임금 인턴을 쓰지 않기
- 나의 위치를 항상 의식하며 책임감 있게 발언하기


등이 있다. 여기가 끝은 아니다. 스튜디오가 잘 돼서 영향력이 커진다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향력이 작거나 존재감이 없거나 우리 스튜디오가 수많은 회사 중 아주 작은 하나의 점일 뿐이라도, 나는 내가 위치한 자리에서 항상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 글 역시 그 노력의 일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