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의 작품이 무화(無化) 시키는 지점
Soohyun Jeong, Dec 09, 2018
이 글에서는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전시에서 본 두 가지 작품을 무無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는 ‘예술과 기술의 실험’의 약자로, 1960년대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휘트먼, 앤디 워홀, 존 케이지, 백남준 등의 예술가와 벨 연구소의 엔지니어, 빌뤼 클루버(전기기사), 프레드 발트 하우어(전기기사)가 결성한 비영리 단체이다. 이들은 미술, 무용, 영화, 과학기술, 더 나아가 산업 영역까지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과 교류를 선도했다.*
워낙 혁명적이고 저명한 그룹이라 전시 전부터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역시 작품은 두 말할 것 없이 유쾌하면서도 5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혁신적이었다.
작품 1. 닐스 & 루시 영 <4분의 3박자 파키르>
닐스 & 루시 영은 이 작품을 두고 인도의 밧줄 묘기를 수행하는 최초의 기계라고 했다. 인도의 밧줄 묘기는 수도자를 의미하는 파키르가 공중으로 밧줄을 던지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일종의 마술이다. 흐느적거리는 끈의 고리를 단단하게 세울 수 있는 과학적 원리를 적용한 <4분의 3박자 파키르>에서 전동기에 매달린 기다란 끈이 시속 약 160km로 솟아오른다.
—전시 설명문 중 발췌
[좌] museum der moderne [우] Machine Show, 1968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계가 묘기/마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묘기/마술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묘기/마술은 본래 과학적 혹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놀라움을 주는 게 그 목적이다. 행위자는 관람자로 하여금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기술 혹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느끼게 하며 그 원리는 추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겨진다. 묘기/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람의 수행이 인지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변모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반면 기계의 수행은 언제나 과학적, 물리적 실현 가능성을 근거로 한다. 누구나 설명만 들어도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스위치를 눌러 기계를 작동시키기만 하면 묘기/마술을 손쉽게 재현할 수 있다. 밧줄을 수직으로 세우는 신묘한 마술은, 단숨에 청소기를 작동시키는 것만큼 쉬워졌다. 관람자가 재현 가능한 마술은 마술로서의 효력을 잃는다. 아무도 청소기를 작동시키는 것을 묘기/마술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작품이 수행하는 것은 어떤 신비한 힘도, 불가사의함도 아닌—즉 묘기/마술이 아닌— 단지 잘 계산된 물리적 반복 운동이다.
여기서 두 가지 차원의 무의미화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기계의 묘기/마술 수행은 묘기/마술이라는 본래적 의미 자체를 삭제함으로 원래의 행위를 빨아들인다. 연쇄적으로, 기계의 존재 의미 역시 의미 없는 물리적 반복운동으로 삭제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였을지도 모른다. 1968년 E.A.T가 개최한 공모전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공모전과 연계된 뉴욕 현대미술관의 <기계시대의 끝에서 본 기계>와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더 많은 시작:예술과 기술의 실험>에 전시되었다*는 문장으로 유추해보면, 작가는 이제 기계가 단지 동력을 써서 움직여 일을 하는 장치가 아닌 묘기/마술, 혹은 예술까지도 수행 가능한 주체가 됐고 그러므로 기계의 정체성이 확장됐다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 작품은 묘기/마술을 수행하는 기계를 만드려다 묘기/마술이라는 속성도, 기계의 속성마저도 무화시켜버리는 아이러닉한 상황을 만든다.
작품 2. 로버트 브리어 <떠다니는 것>
떠다니는 것(floats) 혹은 동력 연체동물(motorized mollusks)이라 명명된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움직이지 않지만 사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력으로 전시장 안을 배회하고 있다.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인데, 정말이지 쓸모없는 기계를 최고의 엔지니어와 예술가가 합작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쉽게 말하면 과도하게 문제가 많은 로봇청소기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진짜 로봇청소기보다 엄청나게 느리고, 먼지도 못 빨아들이고, 높이 183cm에 지름 180cm로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차지할 뿐이다.
Photo by Benoit Pailley, courtesy New Museum
작품 설명에서는 장애물을 만나면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지만 이동 속도가 분당 60cm로 너무나 느리기 때문에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 이상 이를 실제로 알아채기는 힘들다. 어쨌든 작품은 벽이나 관람자를 만나면 방향을 바꾸고, 관람자도 작품을 만나면 방향을 바꿔 전시장을 돌아가야 하니 주변 환경과 서로 유기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은 확실하다.
앞의 작품과 비교해보자. <4분의 3박자 파키르>는 묘기/마술이라는 쓰임새로 생산성이라는 일반적인 기계의 속성을 비튼다. 동시에 끈을 수직으로 세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방법을 취하고 있기에 나름의 목표 안에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떠다니는 것>은 어떤 쓰임새도 남기지 않았다. 단지 ‘아무런 목적 없이’ 전시장 안을 떠다닐 뿐이다. (그 행위 때문에 어떤 해석이 생겨날 수 있어도, 그 해석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는 방식마저도 비합리적이다. 움직임은 너무나 느리고, 그 커다란 부피로 인해 관람객은 전시 감상을 방해받는다. 작품에 의해 관람객의 시야는 제한되고 동선은 우회된다. <떠다니는 것>은 기계는 합리적인 방식을 취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에서 비껴나가며 기계가 갖고 있는 생산성과 쓸모의 속성을 의도적으로 우둔하게 삭제한다. 결과적으로 기계적 본성의 모든 것인 목적, 쓰임새, 합리성이 이 작품에서 모두 무력화된다.
[좌] 장 팅겔리, 뉴욕 찬가, 1960 [우] 로버트 브리어, 장 팅겔리의 뉴욕 찬가에 대한 오마주, 1960
E.A.T.의 작품은 아니지만, E.A.T.의 결성에 단초가 된 작품이 장 팅겔리의 <뉴욕 찬가>이다.(이 작품도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기계다. 뉴욕 현대미술관 정원 조각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실행 27분 만에 스스로 망가졌고, 그 잔해는 뉴저지의 쓰레기장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E.A.T.가 <뉴욕 찬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무無는 단순한 우연이나 느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한 두 작품은 원대한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하고, 하찮고, 쓸모없고, 의도적으로 멍청하며,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된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고 뒤섞으면서 기존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은 이제와 우리에게 큰 새로움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혁명이었던 시대에 혁명의 개념들을 찬양하기보다는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부정적 형용사들을 유쾌하고 명료하게 표현해냈다는 것이 이 작품들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설명을 참고한 부분은 *로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