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반복
Soohyun Jeong, Jan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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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당연하게도 시간적 서사에 의해 진행된다. 서사가 언어로 나오지 않는 경우, 그러니까 이미지만 나열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글이 있건 없건, 결론이 있건 없건, 그림책에선 시간적 흐름과 연속성이 중요하다. 이는 그림책이 꼭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르라서만은 아니고, 책이라는 매체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장 뒤에는 두번째 장이, 두 번째 장 앞에는 첫 번째 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창작자는 독자가 어떤 페이지를 볼 때, 어떤 맥락 위에서, 어떤 흐름 속에서 만난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조를 생각하고, 순서를 조정한다.
(여기서 벗어난 그림책이 아예 없지는 않다. 아트북이나 팝업북 형식일 경우 순서와 서사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 하지만 인터랙티브 아트에서는 앞장도 뒷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의 페이지와 몇 가지 동작, 몇 가지 상호작용이 있을 뿐이다. 순서를 갖고 진행되던 여러 장의 흐름을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해야 한다. 그림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분위기를 가져와야 하며, 그 장면에서 연상되는 동작을 추출해내야 한다. 이는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각 그림책이 갖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것이다.
(물론 인터랙티브 아트도 책과 같이 순서에 따라 진행되도록 만들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단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터랙티브 아트로 변환하는 것일 뿐 기존의 그림책과 무엇이 다른가? 그림책을 영상으로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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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랙티브 아트는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여러 개의 동작이나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다. 하나의 동작(클릭, 드래그, 스크롤 등)으로 ‘예상 가능한’, ‘기대되는’ 상호작용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그림은 이미 한 장으로 형태, 색감, 분위기 등 시각 예술의 여러 정보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가 늘어날 여지가 없는 상태이다. 여기서 정보가 더해지면 사용자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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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하나의 동작과 하나의 반응으로 이루어진 인터랙티브 아트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조를 갖는다.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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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성급히 전통적 매체와 뉴 미디어를 대립시키고 싶지는 않다. 전통적 매체가 대체로 반복적, 자기 복제적, 재귀적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은 맞지만, 모든 뉴 미디어 콘텐츠가 반복적 구조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반복 구조가 인터넷 이후에 발전하게 된 사고방식이란 주장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이것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접어두고, 현재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가 선형적 서사를 갖지 않음에 주목하면서 앞과 뒤, 전과 후가 없는 반복 구조 안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